회원권

국내 골프장과 회원권 시장의 역사

회원권 시장의 역사는 국내 골프장의 태생과는 다소 시차가 상당히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근대 일제 강점기의 수탈과 한국전쟁의 발발로 이어진 비운의 역사와도 관련되어 있다. 이로 인해 골프장의 최초개설 시기는 일본과 별차이가 없지만 암흑기를 거치며 해당 산업의 발전이 저해 되기도 했고 초기 골프장 롤모델도 일본의 회원제 골프장을 답습하면서 독자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한계를 갖게 되었다.
또한 회원권 시장은 태생적으로 골프장을 비롯한 리조트 시장에 종속된 흐름을 보일 수 밖에 없었지만 근래에 이르러서는 회원권 시장의 확대로 독립적인 변수로 변화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 밀접한 관계로 거듭나고 있다.
국내 골프장의
태동
1897 ~ 1932
회원권의
탄생
1953~ 1968
회원권 거래시장
태동
1970 ~ 1989
회원권거래소의
도입기
1990 ~ 1998
회원권 시장의
성장 및 과열기
1999 ~ 2008
회원권 시장의
과도기
2008 ~ 현재

국내 골프장의 태동 (1897 ~ 1932)

국내 골프장의 태동은 1897년 말이라는 설이 있는데, 당시 함경남도 원산항에 해관 관리로 있던 영국인들이 관내에 6홀 규모의 간이코스를 만들었던 것이 일본골프 역사가인 다카히다의 ‘조선골프소사(朝鮮골프小史)’의 문헌상 확인된 바가 있다. 그러나 일부 외국인들의 취미에 따른 전유물격으로 그 내역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않았고 국내에 설치된 최초의 골프장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실체 또한 정확하지 않아 큰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영리적인 목적의 골프장 조성은 오히려 일제식민통치 시기에 찾아볼 수 있는데, 조선호텔 이용객을 위한 부속시설로 9홀 규모의 효창원 골프코스가 1921년 6월 1일에 개장(조선철도국의 이사 ‘안도’의 발기로 6천원 비용으로 착공. 서울,한양CC 연혁에 확인) 되었고, 수익율 재고를 위해 경성골프구락부를 설립(1924년)하면서 골프장영업이 시작됐다. 사실상 효창원 코스는 실질적인 국내 최초의 골프장으로 확인되고 있지만 골프장부지가 효창공원으로 편입되면서 청량리 골프코스로의 이전이 있었고 (1924년) 청량리코스 또한 폐장된 후 군자리 골프코스를(1930년)를 새로이 개장되면서 업황 자체는 역시 불안정한 상태였다. 또한 조성지 자체가 왕릉이나 왕족의 묘역에 위치하면서 일제치하의 민족폄하 수단으로 악용되어 정서적인 반감도 있었고, 주 고객이 조선총독부, 채신부, 군간부 및 일부 이권과 관련된 친일 내국인 정도에 국한되었다. 따라서 일제 주도의 비인간적이고 특권층을 겨냥한 운용방식은 골프가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선입견을 태생적으로 부여 받았다는 비평이 이때를 기점으로 생겨났다는 지적도 있다.

참고로 효창원 코스내에는 조선 22대 정조(正組)임금의 3남으로 5살에 요절한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묘와 정조의 후궁이었던 의빈성씨(宜嬪成氏)의 묘가 있었고 순조(純組)의 후궁인 숙의박씨(淑儀朴氏)와 순조의 장녀 영온옹주(永溫翁主)의 묘가 있었던 자리이다. 또한 청량리코스 및 군자리코스가 있던 뚝섬 왕십리 일대(능동, 군자리, 화양리, 모진동) 역시 왕조의 능(陵)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 되었다. 능동 438번지에 위치한 군자리(君子里)코스는 애초에 능동(陵洞)코스로 불렸었으나 일제가 군자리(君子里)로 명명하면서 한편으로는 이 또한 왕실에 대한 묘욕을 한 셈이다. 이후 명칭이 바뀐 것은 광복 후에 가능했는데, 비로소 ‘능동코스’ 또는 ‘서울CC 능동 코스’라고 개명한 것이라 한다.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1981년), 서울컨트리클럽 50년사 참조(2003년))

한편 비슷한 시기에 지방에서도 골프코스를 조성하게 되는데, 1923년 9홀 규모의 대구 골프코스를 시작으로 1928년 평양 골프코스, 1929년 원산 송도원 골프코스, 1932년 부산 골프코스를 개장했으나 이마저도 세계대전과 6.25발발로 폐장되면서 수난을 겪었다. 또한 규모자체도 9홀 가량으로 미미했고 당시 정세로는 일반인들은 접근이 어려워 역시 현재의 운영시스템과는 거리가 있다.